내가 성장하고 있는 걸까, 내가 조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일까 라는 고민을 꽤 오래 지속했던 적이 있다. 일에 보람을 느끼면서 조금씩 성장하는 내 자신을 보며 뿌듯해하는 그런 모습을 상상했었는데, 늘 마음먹은 대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슬럼프의 정의는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부진 상태가 긴 시간 이어지는 상황"이라고 한다. 내 경우는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기 보다는 자신의 성장에 대해 자신감이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엄밀히는 슬럼프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수는 있겠다. 그렇지만, 약간은 무기력하고 뭔가 속상한 마음이 계속 들었다는 점에서는 넓은 범주에서 슬럼프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 것
처음에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내가 이런 저런 점은 부족하긴 하지, 강점에 집중해야지 등 누가 들어도 동의할 수 있을 만한 생각들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마음은 영 편해지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ChatGPT에게 "데이터 분석가로 성장하고 싶은데 잘 안 되는 것 같아"라는 질문을 남겼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데이터 분석가로서 배워두면 좋을 것, 필요한 역량 등을 구구절절 설명하는데 그 당시의 나는 뭔가 누군가에게 위로나 공감을 받고 싶었던 터라 그 답변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었다.
ChatGPT가 나에게 해줬던, 그다지 도움이 안 되었던 그 답을 스스로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닌가하여 전략을 바꿔보았다.
1. 마음을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장소 가보기
연차를 내고 절에 가봤다. 절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는데,
1. 조용할 거 같아서
2. 열반과 해탈이 불교의 상징인 만큼, 절에 가면 뭔가 깨달음을 얻을 것 같아서
3. 교회나 성당은 어쩐지 신도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아서 였다.
완전 산에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눈이 온 다음 날 언덕길을 올라서 영차영차 열심히 올라 왔다. 힘들게 올라오기도 했고, 절에 온 만큼 뭔가 하나 깨달음을 얻고 가야 뽕을 뽑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괜히 절 주변을 돌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나는 왜 성장을 하지 못하나, 성장에 집착하고 있는가 등등의 생각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다보니,
- 어쩌면 성장을 해야 한다는 그 생각 자체가 성장을 가로 막고 있는 건 아닌가,
- 내가 나를 볼 때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게 성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
라는 흐름을 탔고, 그러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걸 느꼈다. 누가 뭐래도 적어도 나한테만큼은 나 스스로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다짐을 하며 하산했다.
2. 감정을 어루만지기
좀 거창하게 쓰기는 했지만, 이성적인 사고를 버리고 최대한 감정에 근접해보자는 전략이었다. 충분히 이성적으로 얘기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면 반대로 아예 감정에 푹 빠져보면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뭔가 하나로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썩 좋지 않은 감정들이 올라 왔었는데 그 때 "아냐, 이러이러한 감정은 옳지 않아" 라든가, "이런 방법을 써보면 어떨까?"라든가 판단이나 해석이 들어갈 수 있는 여지는 다 빼고, 최대한 이미지로 감정을 느껴보려고 했었다.
그 때 "망망대해를 뗏목 하나로 영차영차 하면서 노를 저어가며 가고 있는 사람"의 이미지가 불쑥 떠올랐는데, 그 때 뭔가 울컥하면서 부정적인 감정이 한풀 꺾였던 기억이 난다.
이성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공감이 필요하고 그 공감은 남이 아니라 내가 해줘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슬럼프에 대응하기
1. 내 감정 상태를 잘 이해해주기
결국 위에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들이 다 감정 상태를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것의 일환이었다. 물론 이성적인 것이 사회 생활을 하는데 중요하지만, 인간은 100% 이성적인 존재는 아니기 때문에 공감이라는 연료가 있어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관점을 바꿔보면 스스로 발전 방향에 대해 모색하고, 잘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성장일 수 있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 그런 자신에게 적어도 나만큼은 응원을 해 줘야 외롭지 않게 커리어라는 레이스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2. 나만의 재미 찾기
일을 천천히 분해해서 보다보면, 적어도 한 가지는 파고들만한 요소가 있었다. 가령 '몰랐던 개념을 이번 기회에 짚고 넘어가보자'라든가, '예전에 해보지 않았던 것을 작게나마 시도해봐서 나만의 토이 실험을 해보고 결과를 기록해보자'라든가 아무튼 한 두가지 정도는 파고들만한 요소가 있었다.
게임에서 주로 쓰는, 비슷한 용어가 있는데 이를 파고들기(야리코미)라고 한다. 게임의 주 목적이 아니라 다른 곁다리를 목표로 삼아 플레이하는 것을 파고들기(혹은 야리코미)라고 부르는데, 어떻게 보면 업무의 본질은 본질대로 지키며 열심히 일하면서, 그 안에 내가 작게라도 재밌어 할만한 요소를 찾고 보람을 느끼는 것 역시 업무의 파고들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담이지만 나는 게임할 때도 이것저것 둘러보면서 파고드는 성격이다.)
내가 하는 일들이 굉장히 유의미한 성과가 나면 좋지만, 세상 만사가 다 내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 법이다. 성과에만 집착하면 업무가 잘 됐는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이 외부의 평가에 의존하게 되지만, 적어도 내가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고, 그 안에서 내가 해보려고 했던 작은 시도로 재미와 보람을 느낀다면 성과를 어느 정도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3. 나만의 강점 찾기
강점이라 함은 어쩐지 남들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나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지만, 그런 생각을 내려놓고 내가 잘 해왔던 것들이 무엇인지,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에 자신감이 있는지를 떠올리는 것 역시 도움이 많이 되었다.
데이터 분석가에게 필요한 업무 역량
강점을 이야기하려면 결국 데이터 분석가가 어떤 일을 잘 해야 하는지를 같이 이야기하면 좋을 것 같아 잠시 옆길로 새본다. 철저하게 주관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데이터 분석가가 하는 일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1. 측정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적절하게 지표를 정의하고, 실험 및 분석을 설계하는 것. AB테스트를 해볼 수도 있고, 준실험 방법론을 써볼 수도 있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데이터 추출 건을 잘 처리하는 것일수도 있고, 대시보드에 들어가거나 조직에서 필요로 하는 지표를 잘 정의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어떤 데이터를 원하는 의도에 맞게 정확하게 측정하는 것이 데이터 분석가의 주 업무라는 생각이 든다.
이를 위해서 SQL이나 파이썬, R 같은 프로그래밍 능력이 필요할 수도 있고,
적절하게 실험과 분석을 진행하기 위한 통계 지식이 필요할 수도 있다.
2. 인사이트 도출
조직이 더 큰 성장을 할 수 있도록 의사결정을 지원하고, 적절한 솔루션을 주는 것 역시 데이터 분석가가 해야 하는 주 업무 중 하나다. 데이터에서 문제를 발견하거나, 문제를 기반으로 적절한 액션 플랜을 제안하는 것이 그 일환이다.
이를 위해서 도메인 지식이 필요하고, 문서를 잘 정리할 수 있는 역량도 중요하다.
과감하게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깡과 자신감도 필요하다.
3. 프로젝트 관리
분석 일정을 잘 관리한다는 개인적 차원을 떠나, 데이터 마트를 구축한다거나 새로운 실험을 해야 한다거나 기능을 추가해야 할 경우, 프로젝트 관리 역량도 중요해진다.
이건 어느 직무나 공통적으로 수행하는 업무 같기도 한데, 이를 위해서는 일정을 잘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고,
일정을 잘 조율하거나, 원하는 것을 잘 얻어내는 커뮤니케이션 역량도 중요하다.
이 때 내가 뭘 잘 할 수 있지? 사실 다 못하는 거 아닌가 하는 좌절의 구렁텅이에 들어가면 안 된다.
기분이 나아지려고 하는 일인데, 이래서는 진전이 없지 않은가.
잘하는 사람과의 비교는 끝도 없고, 강점은 재능과 다르기에 꼭 상위 1%나 0.1%가 아니더라도 내가 좀 잘 할 수 있거나 재밌게 느껴지는 것들을 리스트업해보는 것이 도움이 됐다.
가령, 갤럽의 강점검사 결과를 뒤적여본다거나, MBTI 결과 검사지를 다시 본다거나 하면서 나를 다시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갤럽 강점검사에서의 나의 강점을 3가지만 꼽아보면, 책임감 / 복구(문제해결) / 공감이었다.
그런 영향인지는 몰라도 꼼꼼하게 검수하면서 무언가의 규칙을 발견하거나 에러를 잘 발견하는 편이다. 이 때 당황해서 바로 해결책을 떠올리지는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떻게든 책임감을 갖고 끝까지 방법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또, 통계 공부를 좋아하는 편이라 무언가를 잘 측정하고 증명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데이터 분석가로서 크게 못하는 것도 없고, 그렇기에 잘 하는 것을 더 잘 하도록, 그리고 안 되는 것은 노력하다보면 잘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이 조금씩 다시 생기게 되었다.
슬럼프 때문에 자신감이 떨어지든, 자신감이 떨어져서 슬럼프가 오든, 결국 자신감을 되찾아야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내가 그간 잘 해왔던 것들을 돌이켜보고, 나를 인정해줘야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다.
지금도 종종 부정적인 감정이 불쑥 올라올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려고 노력한다.
감정이라는 것은 고여있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어떤 방향이든 흐른다.
지금 당장 슬럼프로 답답한 마음이 든다는 건, 다르게 생각하면 성장하고 싶다는 나만의 동기가 있고, 또 내가 그간 노력해 왔다는 것의 방증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당장 답답한 마음이 들더라도, 본질은 그게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혹시라도 슬럼프로 답답함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을 너무 채찍질하지 않기를,그리고 열심히 노력해 온 자신의 여정을 보듬어주길 바라본다.
그리고, 정말 수고했다고, 멋지다고 그 말도 꼭 덧붙여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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